채널 제도

 




[image]
'''채널 제도'''
'''Channel Islands'''
[image]


[image]
[image]
채널 제도의 위치
채널 제도의 상세 지도
1. 개요
2. 지위
3. 정치
3.1. 영국 국왕
3.2. 정부
4. 자연
5. 역사
5.1. 독일 점령
6. 경제
7. 스포츠

[clearfix]

1. 개요


영국프랑스 사이 바다에 위치하고 있는 영국령 섬. 정확히는 영국 왕실이 소유하는 영토다. 건지(Guernsey) 섬과 저지 섬(Jersey)을 포함해 올더니(Alderney), 사크(Sark), 험(Hurm), 제투(Jethou), 브레쿠(Brecqhou), 리우(Lihou) 등의 섬을 포함하고 있다. 저지 섬을 제외하고 모두 건지 섬 관할 구역에 속한다.
[image]
건지 섬의 항구
[image]
저지 섬의 항구
총 면적은 198㎢로 면적의 대부분은 저지(118㎢)와 건지(78㎢)가 차지하는 면적이고 인구는 2012년 기준 163,857명이다.
영어가 쓰이는 곳이지만 주민들의 대부분은 노르만족들의 후손이라서 노르만어의 방언들(건지어 등)이 각 섬마다 쓰이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어도 더러 사용된다.

2. 지위


면적이 작고 인구도 적기에 일반적으로 '채널 제도'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하지만 채널 제도는 행정적으로 '''저지 행정관 관할구'''(Bailiwick of Jersey)와 '''건지 행정관 관할구'''(Bailiwick of Guernsey)로 나뉘고 둘은 입법 기관도 따로 가지고 있는 별개의 왕실 속령이다.
영국 영토기는 하지만 채널 제도의 건지 행정관 관할구(Bailiwick of Guernsey)와 저지 행정관 관할구(Bailiwick of Jersey)는 맨 섬과 마찬가지로 영국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영국 왕실의 영토인 '''왕실 직할령'''(British Crown Dependencies)이다. 각 관할구에 독립적인 의회가 존재하고 있고 이들은 '왕실 평의회(The Queen in Council)'에 의해서 왕의 비준(Royal Sanction)에 따라 각 정부에서 법을 수립한다. '왕실 속령'(Crown dependencies)에는 독자적인 입법 기관과 독자적인 정부가 존재해 독자적인 법을 만들어 운영된다. 영국 정부는 이 영토들의 국제 관계와 방위만을 책임진다. 영국 정부 내에서 채널 제도를 비롯한 왕실 직할령 관련 사무는 원칙적으로 법무부에서 관할한다.
채널 제도의 주민은 영국 본토에 자유로이 거주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이 영국 본토로 이주하더라도 투표권, 피선거권, 공무 담임권 등은 없고 가지려면 시민권 획득 절차를 밟아야 한다. 물론 외국인이 영국 시민권을 따는 것보다는 엄청나게 쉽다. 영국 본토와는 여권도 따로 나오지만 해외에서는 대체로 영국 시민권자 여권과 같게 취급한다.
유럽 내 해외 영토로서 가입국 시절에 유럽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지브롤터와는 다르게 같은 왕실 직할령인 맨 섬과 함께 처음부터 유럽 연합에는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채널 제도 주민은 유럽 연합 시민이 아니고 유럽 연합 내에서 이동이나 노동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다만 이들도 유럽 연합 모든 국가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므로 솅겐조약에 따른 이동의 자유는 누릴 수 있었다.

3. 정치




3.1. 영국 국왕


채널 제도가 영국 왕실 속령이 된 이유는 잉글랜드 왕국의 영토가 아니라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망디 공 윌리엄의 5대조인 노르망디 공국의 창시자 롤로 시대부터 내려온 노르망디 공의 영토로서 영국 왕실에 소속된 땅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그때부터 계속 상속되어 온 '''노르망디 공의 영지'''로서 영국 왕실에 속하는 땅이고 영국 왕실이 가지고 있는 '''잉글랜드 왕의 영토'''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오히려 노르망디 공은 프랑스 왕의 신하이므로 넓은 의미에서 프랑스 왕의 영토다. 잉글랜드에 속하는 땅이 아니므로 잉글랜드 의회의 관할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잉글랜드 밖에서는 잉글랜드령 노르망디로서의 채널 제도의 지위가 인정되지 않는다. 1259년 파리 조약으로 인해 잉글랜드 왕실이 프랑스 영토 내의 작위를 아키텐 공작위(가스코뉴 지방을 유지하되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의 예의를 다한다는 조건이 붙었다)를 제외하고는 포기했기 때문이다. 헨리 3세가 노르망디 공작위의 상실을 인정하였으므로 더 이상 잉글랜드 국왕이 노르망디 공작을 칭하고 채널 제도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잉글랜드 국왕에게 속한 모든 섬은 그가 아키텐 공작이자 프랑스의 귀족으로서 있는 한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고 이전에 맺어진 1217년의 램버스(Lambath) 조약과 역사적 기록을 통해 볼 때 이후 이 지역은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잉글랜드 왕에게 속한 땅으로 간주되어 왔다. 국제사법재판소의 1953년 판결문에서도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채널 제도와 노르망디에서 노르망디 공작을 칭하고는 있지만 내부적으로만 쓰는 비공식적인 칭호로 채널 제도의 군주에 대한 호칭의 관례에 불과하고 1259년의 파리 조약 때문에 법적인 작위는 아니다. 진짜 노르망디 공작 작위는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프랑스 왕에게 속한 작위로서 유지되었다가 프랑스 혁명으로 귀족 제도가 사라지면서 폐지되었다. 마지막으로 노르망디 공작위를 받았던 사람은 다름아닌 루이 17세로 태어나자마자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현재도 채널 제도에서는 내부적으로 영국 국왕이 노르망디 공작(Duke of Normandy)으로 행세하고 있다. 영어에서 공작의 여성형은 Duchess이지만 이 칭호는 왕이 여성이라도 Duke of Normandy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여성 작위 소유자와 남성 작위 소유자의 부인의 칭호가 동일하기 때문에 후자로 오해 받지 않기 위해 여성임이도 남성형 칭호를 쓰는 경우가 많이 있고 원래 노르망디는 살리카법에 따라 여성 공작을 인정하지 않는데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아 여왕을 인정하는 잉글랜드/영국에서 채널 제도 현지에서 이 법을 회피하기 위해 남성 칭호를 고집하는 것이기도 하다.[1]
현지의 공식 행사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지칭할 때 'The Duke of Normandy, our Queen' 또는 'The Queen, our Duke'나 프랑스어로 'La Reine, notre Duc' 식으로 공작 칭호를 함께 언급하는 게 일반적이다. 어차피 국제적으로는 인정되지 않지만 그래도 엘리자베스 2세가 1967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본토에 방문했을 때 현지인들이 프랑스어로 "Vive la Duchesse!"(여공작님 만세!)라고 외쳐 줬고 엘리자베스 2세[2]는 "Well, I am The Duke of Normandy!"(음, 저는 노르망디 공작입니다!)라고 화답했다.
한편 백년전쟁 시기부터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국왕을 칭하게 됨에 따라 채널 제도에서도 오랫동안 프랑스 국왕으로 행세해왔는데 이 칭호는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없애라고 강력하게 요구해서 사라졌다.

3.2. 정부


영국 왕실령으로 이 지역의 군주는 당연히 영국 국왕이고 영국 국왕은 자신을 대표하는 대리자인 총독(Lieutenant Governor)을 건지 행정관 관할구, 저지 행정관 관할구에 파견한다. 그러나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모든 내정에 대한 권한은 현지의 자치 의회들이 가지고 있다. 건지 행정관 관할구와 저지 행정관 관할구는 서로 별도의 단원제 의회를 가지고 있다.
영국 국왕이 곧 맨 섬 군주인 맨 섬과는 달리 채널 제도는 영국 국왕이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가진 영토 중 일부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영국 국왕을 대리하는 총독 이외에도 의전상의 지방관인 Balliff(Bailiff of Guernsey, Bailiff of Jersey)가 존재한다. 이 자리는 영국 국왕이 노르망디 공작의 지위로써 임명하는 자리지만 실제로는 현지 의회의 추천을 받아 왕이 승인하는 방식으로 임명하게 된다.
실제 정치는 건지 행정관 관할구 의회(States of Guernsey)와 저지 행정관 관할구 의회(States of Jersey)가 도맡아 한다. 저지 행정관 관할구는 관내 모든 지역을 직할하지만 건지 행정관 관할구는 또 건지 직할 지역, 올더니(Alderney), 사크(Sark) 셋으로 나뉜다. 이 관할구 자체도 일종의 자치 지역인데 그 안에서 올더니와 사크도 자치권을 행사한다. 올더니와 사크는 자체 의회가 따로 있고 건지 의회에도 대표자를 파견한다. 올더니와 사크는 깃발과 문장도 따로 있다. 건지 직할 지역에 속하는 섬으로는 건지 섬, 험(Herm), 리우(Lihou), 제투(Jethou), 르 아누아(Les Hanois), 르 우메(Les Houmets), 크르비숑(Crevichon), 브레홍(Bréhon) 등이 있다.
저지 행정관 관할구 의회는 총 49석이다. 8석은 Senators를 일종의 비례 대표제로 선출하고 29석은 Deputy를 중선거구제/소선거구제로 선출하고 모두 4년마다 치러지는 보통 선거로 선출된다. 5석은 Balliff, 총독, Dean of Jersey,[3] 법무장관(Attorney General, 영국 국왕의 임명직), 법무차관(Solicitor General)이 당연직 의원으로써 겸임하고 12석은 Connétables라고 하는 현지 지방관들의 자리다. 총선은 4년마다 치러지고 의원들끼리의 투표를 통해 '총리'(Chief Minister)가 선출되고 그가 내각을 구성한다.
건지 행정관 관할구 의회는 총 40석으로 올더니와 사크를 대표하는 의원 각 2석을 뺀 38석이 모두 4년마다 치러지는 보통 선거(중선거구제)로 선출된다. 그 외에도 법무 장관(Attorney General, 영국 국왕의 임명직), 법무 차관(Solicitor General)이 당연직 의원으로써 의회에 출석하고 의원들끼리의 투표로 Policy and Resources Committee of Guernsey라고 하는 내각을 구성하고 여기의 수장이 Chief Minister로 불리고 '총리'로 간주된다.
사크(Sark)섬은 2006년에 보통 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봉건제가 유지되던 곳이었다. 그래서 유럽 최후의 봉건 영지로 불렸다. 건지 행정관 관할구 관할이지만 독립적인 법률과 자치권이 있고 인구는 600명 정도. 자동차가 없기 때문에 표지판은 km도 mile도 아니고 도보로 몇분 걸린다는 식으로 써있다. 놀랍게도 사크 섬의 주민들은 봉건제는 이 섬에 알맞는 완벽한 제도라면서 봉건제의 철폐를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600명의 주민 중에 165명 만이 봉건제 폐지를 지지했다.

4. 자연


일년 평균 일조량이 2,000시간에 달하는 따뜻한 기온을 자랑하고 위도에 맞지 않게 아열대 식물들이 자란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에서는 대표적인 피한지(避寒地)로 손꼽힌다.

5. 역사


[image]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예를 들어 저지 섬에서 가장 웅장한 명소인 13세기 마운트 오거이 성 (Mount Orgeuil castle)은 청동기 시대 요새의 폐허 위에 지어졌다. 이곳은 섬의 수도 세인트 헬리어(St.Helier)에서 동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바다 건너 프랑스 본토에 있는 노르망디의 일부였지만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정복왕 윌리엄)가 바다를 건너 영국을 정복한 이후 윌리엄의 대를 이은 영국 왕실이 계속해서 가지고 있던 영지였다. 그러나 백년전쟁의 패전으로 영국은 프랑스 본토에 있던 모든 영토를 잃었고 노르망디 역시 프랑스가 점령했지만 섬이라는 특징 때문에 이곳은 노르망디의 일부임에도 프랑스가 점령하지 못했다. 결국 이 곳은 영국이 프랑스 내에 가지고 있는 유일한 땅이 되었다.[4] 쉽게 말해서 '''영국 왕실이 브리튼 땅을 밟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가장 오래된 영지'''다. 잉글랜드/영국 국왕은 채널 제도에서는 프랑스 국왕이나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군림해 왔다.
이런 애매모호한 입지 때문에 프랑스 역시 이 지역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있어 작게나마 영토 분쟁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 정부가 채널 제도가 프랑스 고유 영토라며 양도할 것을 요구한 적이 있으나 명목상 프랑스 국왕 칭호를 없앤 것과 달리 이건 수백년을 잉글랜드/영국이 실질 지배해온 영토라서 영국도 씹었고 혁명 정부도 완고하게 나오진 않아 큰 분쟁 없이 그대로 영국 영토로 굳어졌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 지역에 위치한 무인도 맹키에(Minquiers)와 에크레우(Écréhous) 섬의 영유권에 관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두 섬이 자국 영토인 쇼제(Chausey)섬 관할에 속한다고 주장했으나 1953년 국제사법재판소는 두 섬이 영국 영토라고 판결했다. 그 결과 이 두 섬은 현재 저지 섬 행정관 관할구에서 관할하고 있다. 이 이후 더 이상의 영토 분쟁은 없었다.

5.1. 독일 점령


채널 제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일하게 독일군에 점령된 영국 영토라는 점이다.[5]
1940년 6월 15일 영국 정부는 채널 제도가 전략적 중요성이 없으니 방어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영국 본토에서는 128km나 떨어져 있었지만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에선 4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이 곳을 지키는 건 득보다 실이 많았다. 반면 독일군에게 채널 제도는 영국과 맞설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채널 제도를 점령하면 이곳에 많은 병력을 할애하기 쉬웠다. 영국 정부는 독일군이 진주하기 2주 전 채널 제도 주민들에게 영국군이 철수한다고 통보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섬에 남았지만 제도 가운데 하나인 올더니 섬은 주민 투표를 통해 전부 브리튼 섬으로 피난하기로 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야 돌아왔다. 소설 '독수리는 내리다'에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독일군만 주둔하고 있는 올더니 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1940년 6월말 일요일 아침에 영국군이 모조리 철수한 채널 제도 건지 섬에 루프트바페수송기 한 대가 착륙했고 권총으로 무장한 독일군이 내렸다. 이들은 영국 공군기 3대가 나타나자 곧바로 도주했지만 곧이어 다른 비행기가 착륙해 육군 병력 세 명을 내렸다.
[image]
그 중 인솔자인 장교가 영국 경찰에게 자신들이 이 섬을 접수할 것이라 통보했다. 독일군 본대는 이 점령 통보 이후 선박을 타고 채널 제도에 투입되었고 병력이 혼성되어 주둔했다.
[image]
건지 섬의 세인트 피터 포트 거리를 행진중인 독일 육군 군악대.
채널 제도를 점령한 독일군은 꽤 신사적이긴 했지만 야간 통행 금지, 금주령, 영화관에서 나치 선전 영화 상영, 해안 방어 시설과 방공 시설 건설 등으로 주민들에게 많은 불편과 불쾌감을 주었다. 나중에 독일군은 주민들이 비둘기를 이용해서 영국 본토에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있다고 의심해 비둘기를 사육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황당한 명령도 내린다. 주민들은 될 수 있으면 독일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얌전히 지냈다. 독일군이 처음 도착했을 때는 이들이 지역 주민들의 상점에서 많은 물건들을 사들였기 때문에 이들을 환영하기도 했지만 본토로부터 계속 내다 팔 물자가 공급될 리가 없었으므로 얼마 안 가 끝났다. 도리어 전쟁 말기로 갈수록 섬의 생산량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기는 (주둔군 병력이 대부분인) 과도한 인구[6]로 인해 식량 부족 문제가 발생했고 1944년 중반 프랑스 북부의 대부분이 해방되어 물자 수송편이 끊기자 더욱 심해졌다. 다행히 기아를 겪는 수준까지 가진 않았다.
[image]
APX 시리즈 포탑이 오른쪽에 달려 있다.
영국군의 계산대로 아돌프 히틀러는 채널 제도를 대서양 방벽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요새로 만들기 위해 해안포로 쓸 중포와 2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채널 제도에 투입된 물자와 병력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대서양 방벽의 전체적인 방어 태세를 약화시켰다. 심지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은 채널 제도는 탈환할 가치가 없다고 보고 보급선만 끊은 상태로 종전 때까지 방치했다. 결국 채널 제도는 나치가 패망한 직후인 1945년 5월 9일에서야 해방되었다.
해방될 당시 독일군 우편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노획된 편지 일부가 2007년 기증되어 2012년 원 수신자와 연고가 있는 독일의 가정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그 편지들에 성탄절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 당시 보급이 끊긴 지 오래여서 이미 우편이 상당히 적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대우가 좋았지만 20대의 육군 장병들은 누리지 못했다. 전방에 병력이 부족해 특히 육군 병력은 전쟁 중후반에 국민척탄병급 중장년과 예비역들로 대부분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곳에 배치된 소수의 젊은 인원들도 상당수가 기존엔 병역 면제나 보충역을 받을 수준으로 심신 상태가 나쁘거나 해공군 등에서 전군시켜 들여 온 이들이라 전투력은 매우 낮았다.
또 이 곳 주변의 작은 섬들 중에 무인도도 있는데 이곳에도 정찰 목적의 소규모 병력을 배치해 두었다. 문제는 여기 있던 독일군들은 무전기가 고장나고 상부에서도 배치해 놓은 걸 잊고 있었기에 전쟁이 끝나고 몇 주가 지난 다음에 비로소 독일이 패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그걸 알게 된 것도 전쟁이 끝나면서 바다로 배를 몰고 나온 어부가 이 섬에 들렀기 때문이라고. 이 실화는 나중에 이탈리아 영화 지중해에 영향을 끼쳤다.

6. 경제


EU와의 관계는 무역권에만 국한되어 있다. 관세 관련 법규는 영국에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조건이 적용된다. EU 전체 안에서 사람과 서비스가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권리는 확대 적용되지는 않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영국 안에서는 전통적 권리를 여전히 누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맨 섬과 함께 조세 피난처로 각광 받고 있고 뉴욕 월스트리트의 부상에도 시티 오브 런던이 아직도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남을 수 있었던 강력한 이유 중 하나다. 조세를 회피하고 싶은 법인이나 개인은 채널 섬에 방 한 칸 빌려놓고 채널 자치 기구에 본사로 법인 등록을 한다. 채널 제도와 맨 섬은 조세 제도가 이런 부유한 사람들에게 매우 유리하게 되어있고 이들을 항상 유혹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각종 세금을 면제받는다. 분노한 각 국가의 세무 기관들이 징세를 하러와도 절차 문제로 소용이 없어 지친 세무 기관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본국의 부자들은 조세 회피를 누린다. 맨 섬과 채널 제도에 조세 회피 목적으로 맡겨진 자금들은 런던 시티의 금융 기관들의 수중에 들어가 이런저런 자금을 사용하는 용도로 쓰인다. 맨 섬과 채널 제도의 이런 기묘한 위치를 영국 정부는 용인해주고 넘어간다.

7. 스포츠


1990년대 프리미어 리그 첼시 FC에서 뛰고 잉글랜드의 1998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으로도 뛴 그레이엄 르 소(Graeme Le Saux)와 사우스햄튼의 원클럽맨, 레전드로 멋진 중거리슛으로 유명세를 날린 매튜 르 티시에(Matthew Le Tissier)가 이 지역 출신이다. 각각 저지 섬, 건지 섬 출신. 둘의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인접한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각 섬마다 비공식적인 축구 대표팀들이 있다. 이들은 FIFA 국제대회에는 참여할 수 없으나[7] 자체적인 리그가 있고 전 유럽 곳곳에 있는 속령들이 한 곳에 모이는 올림픽 비슷한 대회인 아일랜즈 게임에는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저지와 건지의 경기는 그 역사가 오래된 더비 매치 중 하나로 지금까지 무려 100회 이상 열렸다. 이 곳 지역끼리 하는 축구 대회 무라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만 중단되고 1905년부터 계속 이어진 전통이다.
이름난 레이서도 꽤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2년 F1 우승자이자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포뮬러 원을 주름잡았던 나이젤 만셀, 투어링카 챔피언십에서 나름 자리를 돋보였던 앤디 프리얼스(Andy Priaulx)의 출신지다.

[1] 영국 국왕은 여러 칭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는 랭커스터 공작(Duke of Lancaster)이라는 칭호와 맨 섬 영주(Lord of Mann)라는 칭호가 있다. 그리고 잉글랜드/영국 국왕이 잉글랜드 내에서 자동으로 보유한 것으로 간주되는 랭커스터 공작(Duke of Lancaster) 칭호는 여왕이라도 남성형으로만 쓰고 다른 왕실 직할령인 맨 섬의 영주(Lord of Mann) 칭호는 국왕이 여자일 때 남성형으로 고정해서 쓸지 여성형(Lady of Mann)으로 바꿔 쓸지 확립된 관례가 없어 해당 여왕이 원하는 칭호를 골라 쓴다. 그래서 빅토리아 여왕은 여성형인 Lady of Mann 칭호를 썼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남성형인 Lord of Mann을 쓰고 있다. 일단 맨 섬의 영주 칭호는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칭호고 살리카법 따위는 적용되지 않기에 뭐라고 불러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데다가 영국 국왕이 맨 섬의 영주를 겸하게 된 역사가 짧아서 여태까지 맨 섬 영주였던 여왕은 딱 두 명 뿐이다 보니 일어난 일이라고 보면 된다.[2] 프랑스어를 알아 듣고 유창하게 구사한다.[3] 저지 섬 잉글랜드 성공회의 수장.[4] 칼레도 있었지만 약 100여년 후,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서 전쟁이 터지자 블러드 메리로 유명한 메리 1세가 남편인 펠리페 2세를 돕기 위해 참전했지만 앙리 2세의 프랑스에게 역공을 당해 도리어 뺐기고 만다.[5] 이집트(당시 이집트 왕국)는 '''공식적으로는 독립국'''이었고(실상은 영국 식민지에 가까운 보호국이었지만) 이탈리아-독일에게 일시적으로 뺏긴 지역도 황량한 사막 지대라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밖에 이탈리아에게 동아프리카 식민지 일부를 뺏겼지만 금방 되찾았고 일본에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 반도, 북보르네오, 버마를 뺏겼다.[6] 보통 20,000명 이상이 주둔했고 한 때는 40,000명을 넘겼을 정도다.[7] 우수 선수가 있다면 영국의 네 지역의 어느 한 대표팀 선수로 뛸 수 있다.